4) 인적 연망을 보여주는 자료들 ?

1618년 향안 입록 인물로 읍지 인물조에 소개된 이는 9명에 불과하며 조선 초기 인물에 한정되고 있다. 이어서 광주오피 , 1626, 1628, 1634, 1644년의 입록 현황이 기재되어 있는데, 해마다 1명∼4명까지 입록되고 있으며 조선 중기까지 향안 추록 인원이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 향안에는 입록 절차나 심사위원 등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단지 입록 명단만을 적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기록은 모든 행정기관에서 오늘날에도 보관․ 이러한 유림들의 인식은 의병활동이나 을사조약 당시 순절한 의사들의 추모사업, 나아가서는 명성황후의 추도사업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청금록은 향교에 소속된 유림들의 명단으로서 ‘靑衿’이란 푸른 도포를 입은 사람이란 뜻으로 주자의 白鹿洞規에서 사용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사림, 사족, 유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칠원향교의 청금록은 성책의 형태로 4건이 남아있는데, 「靑襟錄」으로 명명하였다. 개인의 소송 및 청원 문서는 다양한 所志類를 통해 관에 제출하였으나, 향교에서는 품목의 형태로 문서를 제출하였다. 2. 소송ㆍ청원 관련 문서 소송ㆍ청원 관련 문서는 모두 89건인데, 서로 연관된 所志ㆍ原情ㆍ山圖ㆍ書目ㆍ牒報ㆍ傳令 등이 77건이며, 토지조사사업과 관련된 신청서가 9건, 통문이 3건이다. 변씨 가는 19세기 후반에만 10여건의 분쟁에 연관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山訟이었다.

칠원향교 소장 고문서 중 격문, 공함 등 6건은 한말의 倡義, 순절인물을 위한 院宇 건립 등과 관련된 내용이다. 또 한말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향교의 역할과 관련하여 1895년과 1896년 진주 안동 등의 창의소에서 동참을 독려한 문서와 을사조약체결 후에 순절한 의사를 위한 원우 건립 모금관련 문서 7건 등이 있다. 기재양식은 입록자의 명단을 다 적은 후에 동안의 끝에 ‘際’자를 적어 끝임을 표시하고 있다. 협조사항을 요청한 문서로는 감모궁 건립비용 모금, 궐리지 간행비용 등의 모금을 독려해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 3건, 영당건립과 관련된 내용 1건, 사회 기강과 관련된 내용 1건 그리고 향교 향사에 참여할 임원의 명단을 보고하는 문서 1건 등이 있다. 읍지와 유안류 그리고 향사 및 제향, 향교 건축 및 중수, 흥학회 및 稧를 위한 기금 마련과 운영에 관련된 회계 기록류가 이에 해당된다. 흥학재는 관청의 지원과 감독 하에 있었으며 따라서 향교 재임은 수입, 지출 및 운영방침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관청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흥학재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림양성과 결집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居接을 통한 학술활동의 진작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충헌공파가 지역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 조사하기 위해 尼山 및 連山의 邑誌들을 검토해 보았다.

칠원향교에는 모두 4건의 전령(훈령 포함)이 전하는데, 산송과 관련하여 該邑의 役丁을 조발하도록 명령한 문서 2건과 관내 건축 및 문집 간행비 분담금을 독촉하는 문서 2건이다. 帖文(帖諭)는 관부의 장이 屬官에게 내리는 문서로서 칠원향교의 경우는 관찰사 또는 군수가 향교에 발급한 문서들이다. 1781년에 스승 이상정이 죽자 스승의 遺文을 정리하였다. 이후 여러 개의 完文에서는 계중의 유사를 江校(江樓ㆍ校洞)와 북촌에서 각각 1명씩 선출하는 것을 常規로 한다는 내용, 契畓 소출 藁草를 거두어 계중에 속하게 한다는 규정, 기존의 契畓을 팔고 새로운 契畓을 만드는 것 등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복원된 향교에는 大成殿, 明倫堂, 東西齋, 風化樓, 景德祠, 慕賢亭 등을 갖추고 있다. 1901년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금액이 기재된 문서만을 기준으로 하여도, 도산서원의 寶木 봉안시의 접대 경비 150냥, 龜巖 문집 중간 분담비 150냥, 二宜亭 중건비용 분담 253냥 등 총 553냥을 부과받고 있다. 성명을 기재하고 거주지ㆍ생년ㆍ字를 기록한 경우도 보이며, 參奉ㆍ進士ㆍ宜寧倅ㆍ本倅 등 지알자의 신분을 기재한 것도 보인다. 양산 통도사(通度寺)도 명신학교(明新學校, 1906년)와 명진학교(明進學校, 1912년)를 개설하였다.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3건은 校任案이고 1건은 1892년에 설립된 강약계 관련 문건이다. 칠원향교의 청금록과 재천안은 동일한 내용의 문건으로 1745년부터 2000년까지의 都有司 및 掌儀 薦案이다. 즉, 미수 허목의 문집 중간ㆍ영정 보수ㆍ이의정의 중건 등을 위해 모금과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의 통문 16건, 남명신도비 건립 문집중간ㆍ남명정사 중건 등 9건, 주자영각과 영정 개수ㆍ궐리지 중간 ㆍ주자어류의 간행 등에 대한 협조 요청 7건 등이 있다. 아울러 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도 간찰에서는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지방제도 개편은 1914년 1월 전면적인 府郡廢合으로 이어지면서 1개의 부군에 2개 이상의 문묘가 존재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향교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적 재편의 시작이라 하겠다. 은 남송의 朱熹부터 19세기 秋史 金正喜까지 名儒들이 쓴 서간문 중에서 학문의 방도에 대한 글을 발췌하여 등서한 것이다. 밀양변씨의 본관 사용과 시조 문제는 19세기 들어 두 문중 사이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된 자료가 1802년 草溪卞氏의 壬戌譜 서문인 「草溪舊譜序」와 밀양변씨 문중에서 초계변씨 문중에 보낸 答通이다. 특히 20세기 초반에 집중되어 있으며 관주도의 신교육기관인 낙육고등학교의 지원과 관련된 내용이다.